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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가야치] Miracles In December
    야치른(谷地受け)/스가야치 2016. 2. 1. 03:36

     "하아─."


     약속 시간보다 조금 더 빠른 시각. 만나기로 한 역 앞은 반짝이는 일루미네이션들을 구경하는 커플들로 가득하다. 나도, 그렇게 보일까. 네가 오면, 너와 함께 걸으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커플로 본다거나─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괜히 손 장난을 치기도 하고, 몸을 풀어보기도 하고, ─핸드폰 배경화면을 띄워 네 사진을 보기도 한다.


     "……몰래 찍은 사진은, 역시 좀 기분 나쁘겠지."


     실은, 찍으려고 마음 먹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 때가 아마 어느 날의 점심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점심을 다 먹고, 남은 시간에 복도로 나와 햇볕을 받으며 겨울철 도통 하기 힘든 광합성을 하는 중이었다.(물론 솔직히 말하면 그냥 햇볕을 받으며 조는 중이었지만) 그 순간, 갑작스레 들려온 남학생들의 구호 소리에 운동장 쪽으로 눈길이 갔고, 그리고 너를 보았다. 다음 시간이 체육 수업인지, 체육복 차림으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몸을 푸는 너. 부활동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까운 사람에게만 보여줄 법한 정말로 자연스러운 미소가, 왠지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무심코 핸드폰을 들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지우려고 했지만,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가 아니면 나는 아마 네 사진을 죽어도 얻지 못하리라 생각했으니까. 끝까지 감정을 숨기려고 했었다. 표현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냥 좋은 선후배 사이로 남고, 그렇게 끝내려고 했다. 그랬는데, '마지막'이라는 것은 사람을 이다지도 '필사적'으로 만든다. 너와, 그저 그런 선후배 사이로 남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이기에, 몸부림쳤다. 그저 작은 파동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수 없는 감정의 산을 넘어, 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울리게 된다면.


     "허억, 허억, 스, 스가, 상!"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너의 목소리가 군중들이 내는 소음에 섞여 귓 속으로 파고든다. 이보다 더 소란스러운 곳이더라도, 나는 네 목소리를 간파할 자신이 있다. 연습 중에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너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으니까. 너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않기로 했기에 더더욱, 너를 담으려고 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생동감 있게, 네 목소리와 네 표정과 몸짓들을.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더라도,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너를 떠올릴 수 있게.


     "안녕, 얏쨩. 안 뛰어와도 되는데, 약속 시간까지 아직 10분이나 남았는데 힘들게 왜 뛰어와."


     "그, 그, 허억, 그렇지만, 스, 스가 상은, 분명, 기, 기다리실 거라구, 허억, 허억, 생각해서……."


     양 볼과 코 끝은 이미 빨갛게 물들인 채, 찬 공기 때문에 코가 매운 건지 눈물을 글썽이는 채로, 따뜻한 입김을 끊임 없이 뱉어내며 어깨로 숨을 쉬는 이 작은 소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며 뜀박질 했을 너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서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쭈뼛거리며 내 앞에 선 너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입 안에 갖가지 감탄사가 나돌았다.


     허벅지까지 넉넉하게 덮는 길이의 연분홍빛 코트 밑에 회색과 분홍이 적절히 어우러진 타탄 체크 바탕의 점퍼 스커트. 척 봐도 추워 보이는 차림이었지만, '이거 보세요! 그래도 보온성을 놓치지는 않았다구요!'라고 외치는 듯이 그 가느다란 목에 두른 하얀 퍼 워머가 사랑스러움을 한층 더 업 시키는 것만 같았다.

     이 엄동설한에 옷은 멋을 차려도, 신발만은 결국 멋을 포기하게 될 법도 한데…라고 생각하며 너의 발등까지 내려진 내 시선에는 사랑스러운 디자인의 베이지빛 에나멜 구두가 들어 찬다. 살짝 높은 굽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지, 중심을 못 잡으며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 너를 더욱 사랑스럽게 비추게 만든다.

     이런 걸 하나하나 따지고 있는 남자는 분명 밥맛 떨어지겠지만, 따지면 따질수록 네가 나를 만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다는 것이 보여서 나는 결국 비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내 웃음에 흠칫, 하며 고개를 쳐든 네가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이제 보니, 너의 눈가나 입가 등에는 은은한 색감까지 감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와중에 화장까지 하고 온 모양이다. 살짝 올려진 립글로즈가 거리의 일루미네이션들의 빛을 받아 은은히 광을 내서, 나도 모르게 핥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이런 이런. 아직은 안 돼. 참아야 하느니라. 스가와라 코시.


     거기에 헤어 스타일은 평소와는 다르게 차분히 내려서 끝 부분에만 살짝 컬을 주어, 마냥 사랑스럽게 느껴지다가도 문득 어른스러움이 물씬 풍겨 오는 것이다. 아아, 순간 우리 둘 다 성인이었다면─하는 생각이 차올라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한껏 치장한 너를 앞에 두고, 아무 짓도 할 수 없다니. 이건 내가 셀프로 조성한 고문 현장인가.


     "아, 저기, 스가, 상?"


     너의 목소리가 네 사랑스러움에 굳어 있던 내 몸을 순식간에 녹여 버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바라본 너는 그 앙증맞은 눈을 도륵, 도륵, 굴리며,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아, 신은 불공평 하구나. 가뜩이나 사랑스러운 외모와 육체에 (실수던 자의던)또 다시 사랑스러움을 넘쳐 흐를 만큼 부어버린 것만 같다.


     "아, 아아, 미안, 미안.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많이 춥지? 일단 저녁부터 먹으러 갈까?"


     "아, 아앗, 네! 그, 그래요!"


     귀여워……. 살짝 굳은 얼굴로, 힘차지만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내 모습이, 귀여워서 호흡이 곤란할 정도가 된다. 그런 모습으로 그런 귀여움은 반칙이라고, 히토카 쨩…….

     내 걸음 걸이를 따라잡는 것이 조금 힘에 부친지, 살짝 결의에 찬 표정으로 빨빨거리며 내 보폭을 따라오는 네 모습이 꼭 어린 병아리 같았다. 그러고보니 머리카락의 색도, 꼭 병아리 같네.


     문득 몇 개월 전의 여름 합숙에서 타교 학생들이 너를 '병아리 쨩'이나 '병아리 매니저'등으로 불렀던 것을 떠올린다. 그 때는 그 의견에 딱히 동감하지 못했는데, 이제 와선 격하게 동감을 한다. 그들의 안목을 다시 보게 된다. 그래. 너는 아직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병아리와 같았다. 그러니까 언제나 내가 지켜볼 수 있는 우리 안에 있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설마 내가 그 우리를 떠나게 될 줄은…….


     뭐 떠난다는 것은 언젠가는 당연히 찾아올 '기정 사실'이었지만.


     "얏쨩,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아, 저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아……만 파스타가 조금 먹고 싶을지도……."


     내 질문에 퍼뜩 고개를 든 너는, 여전히 상기된 볼을 한 채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머뭇머뭇 대답한다. 그마저도 말끝은 흐릴 대로 흐려, 끝 말은 인파들의 소음 속에 묻혀버릴 것만 같았지만 지겹도록 내 귀로 담아왔던 네 목소리인지라 다행히도 너의 말을 끝까지 캐치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파스타로 할까?"


     "핫, 네, 넷!"


     자신의 끝 말을 내가 캐치해 낸 것이 예상 밖이 었는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당황스런 목소리로 삑사리까지 내어가며 군기 잡힌 대답을 한다. 누가 보면 우리가 배구부에서 기합이라도 받게 한 줄 알겠다…. 하지만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서툰 모습까지도 사랑스럽다. 음, 사랑스럽다는 말 일색이지만 사랑스러운 걸 사랑스럽다고 하지 달리 뭐라 말하랴. 솔직히 말해 언어능력은 자신이 없는 편이었다.


     "하으…."


     삑사리를 낸 것이 창피한 건지, 아니면 군기 잡힌 대답을 외친 것이 창피한 건지, 둘 다인건지. 이번엔 귀까지 벌겋게 물들이며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다. 아예 얼굴은 반쯤 손바닥에 파뭍고서 앓는 소리를 낸다.


     "괜찮아. 귀여웠으니까."


     무심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버리자,


     "…!!!"


     머리에 느낌표를 10개는 넘게 띄운 듯한 모습으로 흠칫거리며 살짝 몸을 떨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는 연신 고개만 위 아래로 끄덕였다. 아, 말도 안 나오는 건가.


     "푸흡, 귀여워. 귀여워."


     괴로워하며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이 더 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더욱 짓궂게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으으응."


     핫─.


     "……미, 미안."


     황급히 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고, 큼큼,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아, 큰일날 뻔 했네. 네가 부끄러움이 극에 달해 낸 소리가 왜인지 좀 그렇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정말로, 진짜로, 장소 불문하고 그대로 네 입술로 돌진할 뻔 했다. 위험. 위험하다. '청소년 기의 남학생들의 성욕은 어쩔 수 없다니까~'하고 웃어 넘길 수 있는 수준이아니라고, 그건 진짜로.

     아아, 정말. 이건 셀프 고문이잖아……. 이렇게 힘 주고 나와서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이런 식으로 안달나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고.


     "……저어, 스, 스가 상……."


     "아, 으응? 왜 그래?"


     "……저, 저기, 저, 오, 오늘, 어, 어, 어떤, 가요……?"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지? 내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자, 너 또한 내게서 약 한 걸음 반 정도 물러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눈과 눈을 맞춘다. 문득 주변이 눈에 들어와 둘러 보니, 어느 새 조금 한산한 골목즈음까지 도달해 있었다. 역에서부터 많이도 걸어왔네. 그런 생각이 들 때 쯤, 닫혀 있던 네 입이 다시 천천히 오물거렸다.


     "저기, 그, 저…… 크, 크리스마스에, 나, 남녀 둘이 만나는 것은, 그, 그, 그런, 것이라고 해서, 저, 그, 그……."


     "……?"


     오늘 봤던 중 가장 새빨개진 얼굴이 된 네가 더듬더듬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말을 이어 간다. 작게 오물거리는 입 밖으로 새 나오는 목소리를 한 단어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 세웠다.


     "소, 속, 속옷도, 시, 신경, 써, 써, 써, 써봤, 는데요오."


     아, 이런.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저 스가와라 코시는, 야치 히토카에게 이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몸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가느다랗게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팽-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져 바닥으로 흩어져가는 것만 같았다.


     거칠게 부딪힌 너의 입술에서, 은은한 단내가 풍겨왔다.


     에피타이저로 이만한 것은 아마 내 인생에 더는 없을 것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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