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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야치] 선악과 ②야치른(谷地受け)/스가야치 2015. 12. 28. 11:09
* 약NTR의 표현이 있습니다.
* 캐릭터 붕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약한 수위 표현이 있습니다.
* 거부감이 드시는 분들은 뒤로←를 눌러주세요.
침착하자. 냉정하게 생각하자. 스가와라는 몇 번이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앞에 있는 커피를 연신 벌컥댔다. 뜨거운 커피가 목 구멍을 태우며 지나가자, 그 아픔에 몇 번이고 안 좋은 쪽으로 빠져들던 정신이 퍼뜩 든다.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냥 과제를 하러 간 것임에 틀림 없다. 마침 딱 필요한 자료가 쿠로오의 집에 있어서, 같은 과의 친한 선배니까, 그를 남자로 의식하지 않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집에 따라 들어 간 것이다. 히토카는 둔하고,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분명…….
“하아.”
미치겠다. 안 그래도 시미즈나 사와무라의 문제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스가와라는 몇 번이고 핸드폰의 홀드 키를 눌러대며 히토카에게 연락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고민 하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도 ‘죄송해요. 저는 쿠로오 선배가 더 좋아요…….’ 라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아 차마 누르지 못한 채 핸드폰에서 손을 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그럴 리가 없다. 고 생각했지만, ‘절대로’ 그럴 리 없는 일은 없다. 특히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뇌의 컨트롤 하에 놓여있지 않은 것이 사람의 감정이다. 자신이 이래 저래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히토카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선택 한다 한들 그것은 과연 있을 수 없는 일일까? 자신마저도 시미즈가 아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가와라는 더욱 초조해졌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 좋아. 크게 결심을 한 마냥 눈을 번쩍 뜬 스가와라는 다시 한 번 핸드폰의 홀드 키를 눌렀다. 그 순간.
“드---. 드---.”
진동이 길게 울리고, 핸드폰 배경 화면에 히토카의 사진이 뜨며 그녀에게서 전화가 온 것을 알린다. 스가와라는 급히 핸드폰 화면의 한 켠에 표시된 시계를 확인한다. 벌써 히토카가 말한 한 시간을 넘기고도 삼십 여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이런.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스가와라는 어깨를 힘 없이 늘어뜨렸다.
늘 이런 식으로 고민만 하다 일을 망친 전적이 꽤나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여전히 스가와라는 고민뿐인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히토카에 관한 것도, 시미즈에 관한 것도. 엉거주춤하게 그 사이에 걸쳐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지금의 스가와라 코시였다.
“…여보세요. 히토카?”
반쯤 체념에 절여진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의 그녀를 부른다.
오늘은 꽤나 정신적으로 피곤한 하루였기에 얼른 그녀를 만나 치유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스가와라에게 있어서 비유하자면 히토카는 태양 같은 존재로, 자신은 그녀의 빛에서 태양 에너지를 받는 잡초 정도였다. 그래, 자신에게 히토카는 과분한 존재라는 건 첫 만남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 욕심이 났다. 밝은 빛에 욕심이 났다. 그래서 그녀를 탐했다. 그것뿐이었다. 그것뿐. 단지. 그것뿐.
*
- 지금, 히토카 쨩 잠들어 버려서.
저도 모르게 세게 깨문 입술이 터진 듯, 비릿한 맛이 입 안을 감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히토카의 목소리가 아닌, 그녀와 함께 있던 ‘쿠로오 테츠로’의 목소리. 그는 히토카가 과제 도중 그만 잠들어버렸다고 했다. 자신은 히토카의 집을 모르니, 자신의 집에 와서 그녀를 데려가 줬으면 한다는 말이었다. -하. 짧은 숨을 내쉬며 기껏 정리해 놓은 머리가 엉망이 되도록 휘젓는다. 기가 찬다. 어이도 없다.
- 당신, 히토카 쨩, 남자 친구?
빠득. 빠득. 이를 갈며 교사를 빠져 나온다. 쿠로오의 그 말에는 왠지 모를 비아냥이 느껴졌다. 자신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을 비웃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도로 변으로 나가 택시를 잡는다. 매끄럽게 방향을 튼 택시가 자신의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선다. 택시에 올라 주소를 말한다. 택시 기사는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는지 네비를 기동시키고는 주소를 입력한다.
정말 기가 찬다. 어이도 없다. 히토카. 히토카. 스가와라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히토카만으로 가득 찬다. 그 자식의 집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바로 저지했어야 했다. 젠장. 과거의 자신에게 화를 내 봤자 현실이 변하지 않는단 것은 알고 있지만, 달리 화를 풀 곳도 없다.
- 아, 혹시 몰라 하는 말인데, 히토카 쨩한테 손 안 댔으니까.
그는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 했다. 그리고 그는 그 마지막 말에 잠깐의 텀을 두고, 무언가 말하려 한 듯싶었지만 스가와라는 그의 마지막 말을 채 듣지 못한 채 전화를 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쩌면 듣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쿠로오는 스가와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도발하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으니까. 그 마지막 말까지 들었다면, 스가와라는 이성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
- ‘아직’은, 말이지.
*
쿠로오의 집은 학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대학가 근처라 대부분이 원룸 건물이었고, 사와무라나 시미즈도 이 근처에 있는 원룸에서 살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좁은 골목임에도 차들이 두서 없이 주차되어있던 탓에 택시는 주택가의 입구에서 멈춰 섰다. 대충 미터기를 보고 요금을 기사에게 건넨다.
“탁.”
택시에서 내려 문을 닫자 마자, 빠른 속도로 택시가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하아.”
좁은 택시 안에서 밖으로 나와 시원한 공기를 맞으니 터질 것 같은 머리에 새 공기가 도는 거 같아, 조금 살 것 같았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영수증을 꺼내어 핸드폰에서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열고 그가 불러주었던 주소를 검색했다. 쿠로오가 말해 줬던 주소는 커피숍의 영수증 뒤 편에 휘갈겨 적었었다. 지도에 따르면 쿠로오의 집은 주택가 입구에 난 골목을 따라가면 있을 터였는데, 멀리서 흘끗 봐도 주변 건물과 노화의 차이에서부터 시작해서 디자인 등에서 신축이라는 느낌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방향을 확인하자마자 발을 놀려, 골목가로 들어갔다. 쿠로오의 집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이 앞에서 살짝 꺾어 들어가면, 바로 쿠로오의 집이다. 스가와라는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모퉁이를 돌았다. 새하얗게 칠해진 신축 건물이 빛을 반사해 눈이 부시다. 그 빛에 살짝 눈을 찌푸린다. 조금 지나 빛에 익숙해질 때쯤, 스가와라의 눈에 두 명 분의 실루엣이 비춘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형체에 스가와라는 시선을 집중한다.
“…….”
두 명의 실루엣은 설전과 작은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듯 보였다. 다투는 듯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자세한 대화의 내용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하얀 건물에 빛을 내리쬐던 태양이 지나가던 구름에 가려진 듯, 반사되던 빛이 잠잠해진다. 눈부심이 가신다.
“…히…토카….”
시야가 돌아온 스가와라의 눈에 짧고 샛노란 금발의 여성과 검고 제멋대로 솟은 흑발의 남성이 들어온다. 실루엣은 히토카와 처음 보는 커다란 체격의(아마도 쿠로오 테츠로로 추정되는) 남성이었다. 히토카는 잠 들어 있다고 했을 텐데? 스가와라의 머리 속에 의문이 지나쳐 갔지만, 스가와라는 그 의문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할 수 없었다. 히토카와 몸싸움을 치르던(정확히 말하자면 히토카 혼자서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듯 보였지만) 쿠로오가 멀뚱히 선 스가와라의 존재에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스가와라와 눈이 마주친 그는 그 순간,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씨익- 뒤가 구린 재수 없는 웃음을 보이며 소리 없이 입 만을 움직인다.
‘무슨….’
- 멍청한 자식.
‘……!?’
그의 입 모양에 집중하고 있던 스가와라를 비웃기라도 하듯, 쿠로오가 재빨리 고개를 숙인 채, 히토카의 얼굴을 억지로 들어올려 입을 맞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히토카는 사고가 정지해버린 듯, 어떤 반항도 하지 않는다. 입이 맞춰진 그와 거의 동시에 스가와라의 발은 이미 뛰쳐나가고 있었지만, 이미 둘의 입은 맞춰진 후였다.
“퍼억!”
이후에는 달려온 스가와라를 피하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요지부동이던 쿠로오가 스가와라에 의해 밀쳐 넘어지고, 스가와라가 주먹을 휘두르며 둘은 함께 바닥을 나뒹군다.
……퍽. 퍽. 몇 번이고 그의 눈을, 코를, 입을, 얼굴을, 귀를, 머리를, 손에 닿는 대로 쳐 나갈 뿐. 스가와라의 눈은 이미 반쯤 맛이 나가 있었다. 쿠로오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걸 체념한 듯, 스가와라의 주먹을 다 받아낼 뿐이었다. 둔탁한 소리에 정신을 차린 히토카가 울며 스가와라를 말리지 않았으면, 아마 스가와라는 쿠로오가 숨을 거둘 때까지 주먹을 멈추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코, 코시 상…!! 그만, 그만 하세요!! 코시 상!!”
“허억……. 허억…….”
“코, 코시 상……. 저, 저, 히토카에요. 알아 보시겠어요? 코ㅅ…….”
어깨로 숨을 쉬며, 히토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까맣게 점멸됐던 시야가 돌아와 히토카의 얼굴이 그의 눈에 가득 찬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는다. ‘히토카….’ 속으로 부른 그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 리 만무했지만, 마치 그 소리가 들려 대답이라도 하듯 히토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스가와라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어깨를 끌어 안아 품에 가둔다.
익숙한 향이 나,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히토카, 히토카….’ 속으로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대뇌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에 히토카 역시 안도감을 느낀 것인지,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며 더욱 그의 품으로 얼굴을 묻는다. 이 일이 그녀에게는 꽤나 무서운 체험이었는지,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미안……. 늦어서 미안…….’ 히토카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미안한 마음을 되새긴다.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체취를 맡자 긴장이 풀려가는 것 같았다.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안고 싶은데,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고, 눈을 떠 그녀를 제대로 보고 싶은데, 눈이 떠지질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계속 되새기고 싶은데, 점점 정신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툭.”
“코, 시, 상……? 코시 상!! 코시 상!!…….”
히토카의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와중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
인근 주민의 신고로 달려온 경찰에 의해 세 명은 경찰서까지 끌려와 취조를 당했다.
쿠로오는 경찰서에 도착하기 조금 전에 경찰차 안에서 정신을 차렸는데, 꽤 심한 부상이었지만, 정신이 붙어있었고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인단 이유로 병원보다 진술서 등의 절차가 먼저 이루어졌다. 약간의 응급 처치는 행해졌지만 그래도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건장한 체격의 성인 남성에게 정도 없이 주먹이 휘둘러졌는데 멀쩡한 게 이상한 일이겠지만.
“별로, 딱히 처벌은 필요 없습니다만.”
누가 봐도 피해자인 쿠로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경찰관들은 모두 기가 찬 표정이었지만, 쿠로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제 쪽에서 맞을 짓을 한 겁니다. 뭔가 문제라도?”
-질렸다. 히토카의 표정이 그녀의 말을 대변하고 있었다. 스가와라 역시 이 짧은 순간, 쿠로오 테츠로라는 인간에게 ‘질렸다’라는 감정을 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판 남인 그가 자신에게, 그리고 그의 후배인 히토카에게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그는 뭐 때문에 자신을 도발하고, 히토카를 범하고, 일을 이 사단까지 만든 것이란 말인가?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쯤, 그 의문의 실마리가 경찰서의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테츠로 군!”
익숙한 하이 톤이 경찰서에 울려 퍼졌다.
“……키요코 상.”
쿠로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스가와라도 히토카도 놀란 눈으로 경찰서의 입구로 시선을 향했다. 그 곳에는 숨을 헐떡이며 젖은 눈으로 쿠로오를 부르는, 스가와라 코시의 공식적인 연인, ‘시미즈 키요코’가 서 있었다.
*
“……코시 상.”
자신을 부르는 히토카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떨군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가가 그가 울고 있었단 것을 대변해주었다.
“사와무라 선배 돌아갔어요.”
그녀의 말에 스가와라는 다시 힘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대답할 여력조차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쿠로오와 시미즈가 신분 증명을 끝내고 경찰서를 나선 후, 스가와라와 히토카의 신분 증명을 위해 경찰서를 찾은 사와무라의 입에서 전해진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꽤 예전에, 그러니까 아마 스가와라가 히토카와 관계를 맺었을 적부터, 시미즈는 쿠로오와 교양 수업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우연히 짜진 조별 과제 중, 집이 가깝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 둘 사이에 자잘한 만남이 늘어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는 것은 그저 우정 정도의 감정이었을 터였다. 라고 사와무라는 말했다.
그러나 시미즈가 스가와라와 히토카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되고, 그에 대한 충격으로 쿠로오에게 기대게 되면서 둘 사이에는 다른 마음이 싹텄다는 그런 흔해빠진 진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번 일은 시미즈에 대한 그 나름의 복수, 아니었을까? 사와무라는 거기까지 말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때, 그런 시미즈를 받쳐 준 게 그 자식이 아닌 나였다면 지금 시미즈 옆에 서 있는 게, 나였을까?”
미안. 우문이었네. 사와무라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히토카 쨩한테도 괜히 미안. 바보 같은 친구 녀석들 때문에 무서운 경험을 하게 만들었네.”
“아, 아뇨, 그런…… 전혀……. 아니에요…….”
히토카가 흠칫, 놀라며 손사래를 치자 사와무라는 여전히 웃음기를 걷어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래, 솔직히 히토카 쨩한테도 책임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
그의 말에 히토카는 상기된 볼을 두 손으로 가리며, 푹 고개를 숙인다. 자신에 대한 경멸감과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에 몸이 떨려왔다. 사와무라는 그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스가와라에게로 시선을 옮긴 채 이번에는 웃음기라고는 없는 얼굴로 말한다.
“스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 굉장히 후련하다.”
그렇게 말하고 사와무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제 넘게도 말이야.”
회상을 끝낸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떴다.
현실 감각이 없다. 모든 것이 텅 빈 느낌이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는 느낌. 나는 왜 이다지도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인데. 내가 택한 길이었을 테다. 이렇게 될 거란 것을 아예 몰랐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분명히 느끼고 있었을 텐데, 그것을 모르는 척 무시하고 치워 둔 결과가 곧 이것이다.
나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그보다 어째서 자신이 버린 것과도 마찬가지인 여자친구에게 새 남자가 생겼다는 것으로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는 것일까. 시미즈라면 절대 그럴 여자가 아니라고 어딘가에서 자만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나만 볼 것이라고? 나 말고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라고?
애당초 왜 자신은 시미즈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던 걸까. 단순한 욕심이었을까? 너도 좋지만, 이 사람도 좋아. 라는 그런 안이하고도 자기중심적인 어린 마음에서 비롯 된 것이었을까? 모르겠다.
알 수 없어서 무시하고 치워뒀던 생각들이었다. 이제 와 답을 내라고 눈 앞에 들이민다 한들 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내가 버렸을 텐데. 너를, 내가 버렸을 텐데. 이상하다. 이상하다. 내가, 너를 버렸는데.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인 머리 속에서 끝도 없이 생각이 돌고, 돈다.
아, 아닌가……. 버려진 건 네가 아닌가?
“……아윽…….”
버려진 건, 나였나?
“윽, 하…….”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 온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린다. 정신을 놓을 것만 같다.
“……시미즈, 시미즈…….”
시미즈가 그를 ‘테츠로’라 불렀던 것을 기억한다.
“…아, 윽….”
쿠로오가 그녀를 ‘키요코’라 불렀던 것을 기억한다.
“-아아아악!”
이미 둘 사이에 자신보다도 진한 인연이 존재한다는 것에 참을 수 없이 욕지기가 치밀었다. 들끓는 속이, 뒤죽박죽이 된 머리가, 힘이 들어가질 않는 팔과 다리가, 부자연스럽게 따로 놀며 더욱 그의 정신을 엉망으로 만든다. 쿠로오를 끌어 안던 그녀의 모습이, 그녀를 품에 안던 쿠로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기분 나빠. 기분 나빠. 숨이 거칠어진다. -기분, 나빠.
이미 스가와라의 정신은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심해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 아아…악!!!”
히토카는 가만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제 머리를 감싸 쥐며 발을 구르며 자신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처량하게 보였다. 그는 망가져 가고 있었다. 망가져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던가? 물어볼 것도 없이 그것은 둘의 첫 만남부터.
‘어째서…….’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어째서 내가 아닌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건가요?’ 히토카는 천천히 제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스가와라에게 다가갔다.
“나를 봐줘요…….”
그에게 다가가, 혼탁하게 흐려진 그의 눈을 두 손으로 가리며,
“입을 맞추고…….”
그의 차갑게 튼 입술에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세요…….”
막힌 그의 귀에 속삭이며 그를 끌어 안았다. 자신의 품 안에서 발작하듯 몸을 떠는 그를, 더욱 세게 끌어 안는다. ‘내가 있잖아요.’ 눈을 감는다. ‘내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지 않아.’
아름답게 세공 되어, 모두가 아름답다고 칭하는 자의 목에 걸어진 그를 주제도 모르고 히토카는 탐했다. 그리고 그는 그로 인해 버려져, 바닥을 구르며 빛을 잃고, 탁해져 버렸다. 아름다웠을 적 모습이 사라진 가치를 잃은 보석.
그러나 히토카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주워 들었다. 누가 봐도 볼품 없이 깎이고 마모되고 제 빛을 잃은, 보석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 ‘돌’은 여전히 히토카에게는 빛나 보였다. 그것을 품에 안고 히토카는 눈을 감는다.
*
어두운 방.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만이 유일한 빛. 침대 위에 누운 그의 몸 위에 올라타 몸을 움직이는 여성의 나체가 달빛을 받아 흐릿하게 곡선을 내비친다. 죽은 듯이 누워만 있는 그를 안고, 입을 맞추며, 이제야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된 것에 기뻐하며 탐한다. 이제야, 보석은 나의 것이 되었다. 빛을 잃었다 해도, 마모 되어 볼품 없는 모양이 되었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애초에 이브는 아담이 어떤 모습이던 상관 없었다. 오로지 그에게 사랑 받기 위해, 그녀는 뱀의 말에 홀린 척, 선악과에 입을 댔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 마저 상관 없었다. 사랑을 해 주지 않더라도 좋았다. 자신의 곁에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남아만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히토카는 만족할 터였다.
그런데,
“……코시 상, 나를…… 사랑 하나요?”
그걸로 충분할 터인데,
“코시, 상……. 사랑…… 해 주세요…….”
그럴 터인데,
“히토카……하고, 제 이름, 다정하게…… 불러 주세요……. 웃어, 주세요……. 나, 나…….”
사랑이 없어도 된다고 말하면서 몇 번이고 그에게 사랑을 구한다. 그를 억지로 안으며, 사랑 받고 있는 척을 한다.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강제로 몸을 섞는다. ‘나를 사랑하죠?’라고 묻는 것과 같은 행위의 반복.
눈가가 뜨거워지고, 코 끝이 시큰해져 온다.
“흐윽……. 코시……. 상…….”
이제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를 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줄 사람은 없다. 그녀가, 망가뜨렸다. 빛을, 빼앗았다.
“흐, 으, 으아아아…….”
선악과를 탐한 아담과 이브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고통과 죽음을 알게 된다.
아담은 죽었고, 이브는 고통을 받는다.
영원히 깨지 않는 악몽 속에서, 이브의 고통은 계속 된다.
영원히.
*
[스가야치] 선악과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②
written by WO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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