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아무도 없다. 그 안에 나를 품지 않은 너 따위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너를 갖지 못한 나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붉은 머리가 희뿌연 바람에 미적지근하게 흔들린다. 언제나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던 그의 머리칼은 바람의 탓인지 조금, 아주 조금 탁하게 보였다.
-.
“테츠야.”
그의 목소리에 갈고리라도 달려있는 듯, 쿠로코는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거둔 채 다시 그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벌써 몇 시간째 이 의미없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아카시군.”
“응?”
“대체 저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이유?”
아카시는 알 수 없는 말들이 적혀져 있는 책에서 시선 한 번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늘 있는 일이지만, 겪을 때마다 화가 나는 행동이었다. 쿠로코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여기다 절 붙잡아 둘 생각인가요?”
“네가 죽을 때 까지.”
“무슨!”
“네가 죽어서, 그래서 온전히 내 것이 될 때까지.”
-질렸다.
쿠로코는 못 볼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미소짓는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시는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 치우시죠.”
라며 쿠로코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앉아.”
아까 전과는 달리,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육중하게 방 안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그대로 갈고리가 되어 쿠로코의 옷깃에, 목덜미에, 손목에, 발목에 휘감겨 아릿하게 그를 잡아챈다.
쿠로코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바라보았다.
“지겹지도 않습니까?”
“응.”
“저는 지겹습니다만.”
“그게 좋아.”
“…….”
“나에게 질릴 정도로 나에게 물드는 네가 좋아.”
“불쾌합니다. 역겹습니다. 그 입 좀 닥칠 수 없나요?”
그제서야 아카시는 느릿느릿 책에서 시선을 거두어 눈을 치켜세워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너무나도 영롱하고 아름답게 빛나면서도 어딘가 서늘하고 음침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가히 굶주린 맹수의 눈이라 해도 믿을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쿠로코는 몸서리를 쳤다. ‘정말 싫은 눈이군.’
“역시 난 테츠야에게는 안 되겠어. 그렇게 경멸하는 눈빛까지 사랑스러워. 하지만, 적당히 하도록 해. 나는 그렇게 인내심이 강한 남자는 못 될 뿐더러.”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으며 아카시는 미소 지었다.
“마음이 넓은 남자도 못 되거든.”
질척질척한 미소. 쿠로코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책을 덮었다는 것은, 오늘은 이만 가봐도 좋다는 허락의 의미였다. 쿠로코는 잰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그 방을 나와 들이 마시는 공기는 언제나 꿀맛이었다. 그렇게 그리웠던 바깥 공기를 질릴 정도로 들이마신 후에 쿠로코는 언제나처럼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이 시간은 쿠로코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그를 만나러 가는 시간. 그 어느 누가 좋아하지 않고 배길 수 있으랴.
-덜컹.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아 뵈는 옥상의 철문은 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와있는 ‘그’로 인해 이리도 쉽게 열려버린다. 쿠로코는 이 옥상의 문을 열 때마다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오미네군.”
쿠로코의 목소리에, 교복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쩐지, 야한 소리. 쿠로코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으음, 테츠야.”
잠결에 푹 잠긴 목소리가 쿠로코의 몸을 휘감았다. 아,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쿠로코는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뭍고, 혓바닥을 놀리고 치아를 부딪히며 그를 달아오르게 만들고 싶었다. 아랫도리가 부어오르는 느낌에 쿠로코는 절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아오미네군.”
쿠로코는 호흡을 가다듬고서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다. 그러자, 시원스럽게 바람 소리를 내며 그가 쿠로코의 앞에 착지했다.
“위험합니다.”
“별로, 위험할 것도 없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오미네는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아무런 긴장감 없는 모습에 안심이 됬다. 그와 함께 있으면, 골치 아픈 일은 모두 재쳐둘 수 있었다. 눈 앞의 현실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것이 좋아서, 쿠로코는 언제까지나 그의 곁을 맴돌았다.
그의 손을 만지지도 못하면서, 안기지도 못하면서, 그저 이 관계가 깨질세라 그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갑시다. 아오미네군.”
“엉.”
쿠로코가 손을 내밀자,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짝! 소리나게 부딪히고는 쿠로코를 재쳐 순식간에 계단 밑으로 모습을 감췄다. 쿠로코는 조금 벌개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손, 잡자는 소리였는데.”
아쉽지만, 그와 자신의 거리는 이 정도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미지근한 거리. 하지만 안정감 있는 그 거리. 쿠로코는 손을 두어번 쥐었다 피고는 아오미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두어층을 내려왔을 무렵, 익숙한 아오미네의 뒷통수가 드디어 보이기 시작하자 쿠로코는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오미네의 이름은 불려지지 못한 채, 쿠로코의 목구멍에서 공회전 하기 시작했다.
“…테츠야.”
질척거리는 미소가 쿠로코의 시선에 들러 붙는다.
“나는 바로 간 줄 알았는데….”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쿠로코의 몸을 더듬는다.
“…아오미네랑 같이 있었어?”
“…아.”
“뭐야, 테츠야. 아카시랑 같이 갈 약속 했던 거면 말을 하지 그랬냐.”
“아니, 틀…!”
“미안, 아오미네. 테츠야가 약속을 까먹었나 봐.”
“뭐, 상관 없지만. 셋이서 돌아가도.”
“아아, 오늘은 따로 들릴 곳이 있거든. 테츠야랑 둘이서.”
“그래?”
입을 열 수가 없다. 후들거리는 손과 발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관자놀이서부터 식은 땀이 흘러 턱 끝에서 방울져 떨어진다. 아오미네는 아카시와 쿠로코 사이의 이상한 기류에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답다면 그 다운 일이었지만.
‘제발, 아오미네군, 눈치 채 주세요. 뭔가 이상하다고, 테츠야가 이상하다고. 제발.’
하지만 그 또한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지 못한 채, 의미 없는 공회전만 반복하다 속으로 꺼져버렸다.
“그럼, 난 먼저 간다. 사츠키 녀석 기다리고 있을거고.”
“아아, 그래. 내일 또.”
“그래. 테츠야도 조심히 가라.”
아오미네는 무심히도 쿠로코의 기대를 짓밟고서 남은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가 이윽고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쿠로코는 마른 침을 삼키며 시선을 자신의 발끝에서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들키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 실은 언젠가 들킬 거란 걸 각오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경고까지 했는데….”
아카시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그는 경고했다. 오늘. 분명히. 그 경고를 무시한 것은 쿠로코, 자신이었다. 현실 도피였다. 언젠가 들킬 것을 알고 있었고, 무의식 중에 아카시가 이미 눈치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에게로 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언제나 깨닫고보면 그의 품을 원하고 있었던 자신이었다. 멈출 수 있을리가 없었다.
현실도피 따위 하는 게 아니었어.
또 다시 비집고 나오지 못한 목소리는 의미 없는 공회전을 시작한다.
“경고를 무시한 건, 테츠야지?”
“앗!”
“나는, 나쁘지 않은 거야.”
질척거리는 미소를 만면에 띄운 채, 아카시는 쿠로코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쿠로코는 아카시에게 질질 끌려갔다.
쿠로코는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체구임에도 어디서 이 힘의 차이가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쥐어잡힌 머리칼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에는 한 톨의 힘도 실을 수가 없었다.
쿠로코는 자신의 머리채를 쥔 아카시의 손을 풀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허공에 헛 손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카시는 마치 덫에 걸린 토끼의 귓방맹이를 잡아챈 것처럼 가볍게 쿠로코를 질질 끌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어느 새, 육중한 옥상 철문 앞에 아카시는 멈춰섰다.
“여기가 밀회의 장소? 테츠야의 취향은 뭔가 마니악하네.”
아카시는 옥상의 문을 열어재끼고는 거칠게 쿠로코를 옥상 바닥에 내던졌다. 쿠로코는 옥상 바닥을 구르며 신음했고, 그 모습에 아카시는 희열에 찬 표정을 지었다.
“하하, 하하하! 방금 신음 왔어. 이렇게 짜릿한 뭔가가…! 조금 더, 들려줘. 테츠야.”
-싫어. 싫어. 싫어.
끝 없는 공회전.
“여기서 그 녀석이랑 어떤 짓을 했어? 어떤 짓을 당했어? 네 몸을 더럽힌 거야? 그 자식이 자신의 것으로? 그 녀석의 것은 어땠어? 컸어? 감당할 수 없을만큼? 그것이 몇 번이나 너의 안을 찌르고 더럽힌 거야? 꾸역꾸역 자신의 것을 삼키게 한 거야? 아아,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거친 손길이 단정한 교복을 찢어발기듯 벗겨낸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그 녀석의 냄새가 나. 짙은 숫놈의 향기.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내 테츠야는 이렇지 않은 걸. 깨끗하게 해줄게. 내가. 테츠야. 내 것으로 꽉 채워줄 테니까. 테츠야의 안은, 언제나 내 것으로 질척질척하길 원해. 아아, 테츠야. 새하얀 피부…. 여기에 몇 번이나 그 자식의 입술을 받아준 걸까. 그런 걸 생각하면 나는, 참을 수가 없어. 네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 아아, 테츠야. 테츠야. 테츠야. 더 이상 못 참겠어.”
아무런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 목소리가 쿠로코의 귀를 찢어 발긴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작은 구멍까지도 억지로 찢어 발겨버린다. 그제야 쿠로코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아카시의 등허리를 긁어댔다.
“아, 아, 아아. 아아…! 테츠야의 안, 굉장해. 아아, 아아. 좀 더 일찍 나의 것으로 만들 걸 그랬어. 테츠야. 테츠야. 테츠야. 아아, 좀 더 내 것으로. 좀 더 나한테….”
머릿 속이 정지하고, 눈 앞이 흐릿해진다.
아랫 쪽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굉장한 고통이 찌릿찌릿 올라온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찔끔 나왔다.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손은 자신의 것을 몇 번이고 찔러넣는 그의 등허리를 절로 찢는다.
그와 동시에 뒷통수가 아릿해져오며 이상한 기분이 벅차오른다. 그를 거부하는 이성과는 다르게 몸은 그를 갈구하며 비릿한 액을 쏟아낸다. –싫어. 안 돼.
“테츠야, 테츠야, 테츠야, 테츠야. 나의 테츠야.”
그의 목소리가 진득하게도 질척거리며 귓가에 흘러 넘친다.
“내 것으로 더럽혀진 테츠야, 사랑해. 사랑해.”
“아, 윽…!”
그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자, 고통은 배가 되었다. 절로 신음이 세어 나온다. 반동으로 인해 고개를 추켜 들었다. 흐릿해진 시야에 붉은 석양에 물든 구름이 흩날린다. 푸르렀던 하늘은, 물빛으로 빛나던 구름은, 그 강한 색채에 물들어 붉게. 붉게. 붉게 물들어 간다.
마치, 자신처럼.
“아, 윽, 하아, 하아, 테츠야, 테츠야, 테츠야, 테츠야, 테츠야…! 아윽…!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가 쿠로코의 위로 쓰러졌다. 아카시의 붉은 머리칼이 쿠로코의 얼굴을 덮었다. 흐릿해진 쿠로코의 시야에 검붉은 빛이 가득찼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안의 가득 매워진 아카시의 흔적이 역겨웠다. 잠시나마 ‘기분 좋다’고 느끼며 액을 쏟은 자신의 몸도 역겨웠다.
…….
그리고 그 순간에도, ‘아오미네군과의 행위도 이런 느낌일까?’라는 생각을 해 버리는 자신이, 참으로도 걸레짝 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