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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야치] 소나기야치른(谷地受け)/오이야치 2016. 1. 25. 06:53
"아…."
후두둑. 후두둑.
일기 예보를 보지 않은 나의 잘못일까. 미팅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이런. 양복이 젖음 큰일인데. 그렇다고 서류 가방을 우산으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직 다음 미팅까지는 시간이 꽤나 있었고, 장소도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럼, 비가 그칠 때 까지 잠깐 근처에서 비를 피하도록 할까.
크게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빠르게 근처 커피숍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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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2층 창가 쪽의 구석진 자리에 몸을 앉혔다. 머그컵의 따뜻한 온기와, 뜨겁고 진한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그러고보니, 너는 아메리카노를 못 마셨지. 그래서 늘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나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는 일부러 카페에 오면 아메리카노만 주문했다. 실은, 딱히 그렇게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그보다, 네가 있었음 분명 오늘 같은 날, '오늘 일기 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으니까요!'라면서 우산을 쥐어줬을텐데…….
이런.
멍하니 있다보면 언제나 너에 대한 생각 뿐이다.
"안 되겠네요. 오이카와 상."
그렇게 중얼 거리며, 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이제는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쓴 맛. 그런데 어째서 이 고독의 쓴 맛은 아무리 머금고, 삼켜도 익숙해지질 않는 걸까.
너의 빈자리는 너무도 크게 남아있다. 물론 네가 없다고, 내가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온종일 네 생각만 하느라 다른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왜 대개 드라마나 영화 같은데서는 곧잘 그러잖아. 여자랑 헤어지고 폐인이 되는 남자들, 자주 나오잖아. 나는 나도 그럴 줄만 알았다. 그래서 네가 나를 떠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불안해하고 울고 불며 매달렸다.
하하, 이 천하의 오이카와 상이 그렇게 매달렸던 여자는 네가 처음이라니까.
하지만 그것이 네 목을 조르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후우… 쓰다."
늘 다른 사람들 앞에선 실실 웃는 모습이었던 난, 실은 속으로는 누구에게도 내보여주지 않은 고독이란 놈을 키우고 있었어서, 이 놈에 대해 처음으로 눈치를 챈 것은 가장 친했던 소꿉친구도 아닌, 별로 연결 고리도 없었던, 타 학교의 그것도 두 살이나 어린 매니저였다.
"오이카와……상은 뭔가, 좀, 외로움을, 많이 타시는 거 같아요."
나와 몇 마디를 섞어보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그런 말이라, 나는 참 기가 찼었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라고 받아칠 수도 있었지만, 되려 그 말을 한 본인이 마치 죽을 것만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죄송하다며 한참을 저자세로 나오는 지라, 그렇게 쏘아댈 수도 없었다.
물론 건방지다던가, 그런 생각보다는, 이제와 생각해보면 허를 찔려서 기분이 나빴던 것 같다.
왜 내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한 말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방어 태세로 돌입해서 역정을 내거나 하잖아?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훌륭하게 간파 당했던 것이다. 나보다 어린, 겨우 말 몇 마디 섞은 게 다인 여자아이에게. 내 속을. 전부 다.
하지만 왠지, 그러니까 정말 왠지. 간파 당하고 나니까 말이야, 그러고 나니까. 아, 얘라면 어쩌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아 얘라면 내 고독을 없애줄지도 몰라. 없애진 못해도 덮어줄 수 있을거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론 내 쪽에서의 반 강제적인 대쉬로, 사귀는 것에 골인.
"……그 때까진 좋았었는데 말이지."
너는 여즉껏 내가 겪었던 여자들과는 정 반대라면 정 반대인 타입으로, 소심하고, 자기 주장도 없고, 자신감도 없고. 뭐 하나 잘난 점이라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는, 그저 얼굴이 조금 귀여운 정도인 아이였는데. 그런데 그러면서도 어느 때 보면, 의외로 끈기도 근성도 있고, 책임감도 있고, 올곧은 면이 있어서 정신을 차리니 나는 너에게 푹 빠져 있었다.
"─히토카."
너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아마 다른 누군가와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누굴 만나던 나보다는 좋은 사람일 것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겠지만. 머그컵을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네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웃고 있을거란 생각을 하니, 아직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렇게나 분하다.
역시, 나는 안 되겠다.
네가 없으면.
그러나 이런 내가 너에게 '돌아와 줘.'라는 말을 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아니 그런 소리를 하면, 그건 정말 구제 못 할 쓰레기인거지.
히토카와는 고등학교 적 부터 사귀기 시작해, 주변에서 나오는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 대학생이 되고, 대학생을 졸업하기 몇 개월 전 까지 사귐을 이어 갔었다. 나 자신 조차도 그 사실에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히토카는 내 고독을 없애줄 수도, 덮어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히토카와 사귀는 와중에도 다른 여러 여자와 뭐, 여러 짓을 하고 다녔다. 쓰레기 같은 남자였지만, 히토카는 다 알고 있었음에도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탓하지 않았다.
"토오루 상은,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요. 저는 이해해요. 저 정도로 외로움이 해소되지는 않을테니까요."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른 여자의 향수 냄새로 범벅을 한 채 집에 돌아오면, 너는 늘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이럴 땐 화를 내란 말이야. 왜 그딴 식으로 구냐고,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욕하고 때리고 화를 내라구.'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해봤자 너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기밖에 더 했을까.
결국 그 짓도 얼마 안 가 그만 두었다. 다른 여자를 아무리 만나도, 내 근본적인 고독은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히토카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를 좀 먹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그 짓을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다른 여자들을 만나며 나름 분산해오고 있었던 고독이, 그 짓을 그만두고서 결국 터졌다고 보면 되었다. 그리고 히토카는 나의 고독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뭐, 그 정도까지 버텨준 것만 해도 감사하고, 용한 일이지만.
"……미안해요, 토오루 상."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야 할 일이었다. 뒤 늦게 생각해보면,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해준 적은 아마 한 번도 없었을테니까. 나는 오히려 나의 고독의 해소를 위해서 너를 만났고, 너에게 기댔고… 좋은 말로 포장해봤자 웃기지만, 결국 너를 이용한 것이었으니까. 미안하단 말은 내가 백 번, 천 번을 해도 모자랐다.
응. 그래, 나는 너를 이용한거야.
너를 제대로 사랑해 준적도 없고 말이지.
"애초에 내가 사랑이라는 것도 웃기지……."
착잡해지는 기분에, 또 다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하지만, 분명 나는 히토카를 '사랑'한 적 따위, 단 한 번도 없을텐데, 어째서인지 지금까지도 히토카를 놓을 수가 없었다. 히토카와 연결 된 아주 작은 실을, 끊어질 것 같이 팽팽해진 끈을, 끌어당기지도, 그렇다고 놓치도 못한 채로. 어중간하게 서 있는 꼴.
아, 이와 쨩이 보면 분명 욕 하겠지. 욕 먹을만 하지.
소중하게 대해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면서, 상대방이 나를 소중히 여겨주길 바라다니. 기가 차는 일이다.
"비, 더럽게도 많이 내리네."
언제쯤 그칠까.
빗줄기가 점점 굵어질 때 마다, 점점 의욕 또한 사라진다.
"그냥, 다 때려칠까."
무엇이든지 열심히 매달려도, 나는 언제나 어중간한 위치에서 멈추었다. 배구도 그렇고, 취업도 그렇고, 여자도, 인생도. 아무리 노력하고 열심히 해도, 나는 늘 어중간한 포지션.
네가 없어진 지금은, 더욱더 어중간한 상태인 내 자신이 갑자기 너무도 한심해 보였다. 뭐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걸까. 무기력함이 몸을 덮쳐와 어깨가 무거워 졌다.
문득 히토카가 보고 싶어진다. 그 순수한 미소를 볼 수 있다면. 조금은 살아갈 의욕이 날 지도 모르는데.
"참, 또 바보같은 생각 한다."
그렇게 자조하며, 또 또 다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히-토-카-쨩."
어디서 뭘 하고 있니?
누군가 다른 사람 만나고 있으려나.
너 말이야, 가끔 집중하면 집중력이 엄청나서, 책상 같은데서 널브러져 잘 때 있으니까 좀 조심하라고.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 거야?
과제 많다고, 에너지 드링크 같은 거 많이 마시지 말라고.
또 요상한 복학생 놈이 추근덕 대면 싫은 건 좀 싫다고 말 해. 바보 같이 당하지 말고.
그리고.
─그리고.
오이카와 상을, 좋게 추억해주고 있니?
"하하. 꼴 사납네, 꼴 사나워. 천하의 오이카와 토오루가……."
정말로 꼴 사납다. 얼른 이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모든 게 비 때문인 것 같다. 너에게서 더 멀어지면, 비가 그칠까? 아, 이번에 외국 장기 출장 사원 뽑던데, 지원해 볼까. 그럼 영어 다시 공부 해 놓을까. 토익, 토익을 내가 몇 점 따놨드라. 갱신, 해야되던가.
아, 모르겠다. 그냥, 그냥 네 얼굴이나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보고 싶다.
"보고싶다……."
누군가를 이렇게 보고싶다고 생각한 적이 인생에서 있었을까. 아마 없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없겠지.
누군가가 들으면 어이 없을 정도로 별 거 아닌 것이, 나에게는 너무도 커다란 것이어서, 네가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 나를 후벼 파고, 너에게 빠지게 만들었으니, 네가 나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 벌로,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비, 진짜 안 그치네."
창문 밖으로 올려다 본 구름은 여전히 까만 잿빛. 저 멀리서는 쿠르릉, 쿠르릉 하고 구름이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앞으로도 한 동안은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심코 시계를 보니, 아슬아슬한 시간대까지 시계침이 움직여 있어서, 나는 반쯤 비운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들이키고 몸을 일으켰다.
관둬버릴까, 라고 말은 했지만, 실제로 관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죽을 각오가 없는 이상, 나는 계속 살아야 했고, 살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필수 불가결이었다. 묘한 곳에서 현실적인 생각으로 돌아오니 기분이 묘했다.
비워진 머그컵을 올린 쟁반을 알바생에게 건내주자, 알바생이 '감사합니다.'라며 친절한 미소를 짓는다. 무심코, '히토카랑 닮았네.'라는 생각을 해 버렸다. 음, 아니야 히토카 쪽이 훨씬 더 귀여운 걸.
"앗, 어서 오세요."
그런 생각을 하며, 알바생에게서 몸을 돌려 출입문으로 발을 옮기려던 순간, 손님을 받는 알바생의 목소리에 무심코 든 시선에 잡힌 한 사람 때문에,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아, 어쩐지, 바깥의 비가 그치고, 구름 틈새로 햇살이 비추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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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WOOUL